독일과 덴마크 국빈·공식방문 취소, 소설을 욕보이지 말라.
[간호윤의 실학으로 읽는, 지금] 독일과 덴마크 국빈·공식방문 취소, 소설을 욕보이지 말라.
[간호윤의 실학으로 읽는, 지금] 독일과 덴마크 국빈·공식방문 취소, 소설을 욕보이지 말라.
‘13회 출국·15개국 순방·578억 비용’ 2023년도 대한민국 대통령의 외국 출장 기록이다. 이런데 독일과 덴마크 국빈·공식방문을 나흘 남겨 놓고 취소하였다. 기네스북에 등재한다며 그렇게 외국 나들이를 좋아하더니 이게 웬 일인가? 공적인 순방 취소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대통령실 한 관계자가 14일 “여러 요인을 검토한 끝에 연기하기로 결정했다”가 전부이다. 언론에 ‘윤 대통령이 국내 민생 현안에 집중하기 위해 결단을 내린 것’, ‘의대 정원 확대 발표에 따른 의료계 집단 행동 가능성 대비’, ‘총선을 50여 일 앞두고 민생 일정을 늘리려는 의도’, 여기에 ‘북한 도발’ 운운이라는 보도가 여기저기서 나온 종합이다.
이미 방문 준비를 위한 일행은 떠났고 양 국가에서도 맞을 채비를 하느라 들어 간 ‘수고와 경제비용’을 합치면 어림셈치기조차 어렵다. ‘수고와 경제비용’은 차치하고 유례없는 국가 간 결례이기에 추측성 기사들이 난무한다. 그중 ‘김건희 여사 명품 가방 수수’가 유독 많았다. 함께 가자니 부정 여론이 크고 혼자 가자니 그렇고 하여 여부를 결정치 못하다 나흘 전에 최종적으로 순방 취소를 결정한 것이 아니냐는 기사이다. 이를 두고 대통령실에서 “소설 중의 소설”이라고 반박하였다.
아니다! 소설에는 이런 터무니없이 황당한 이야기를 쓰지 않는다. ‘소설’을 모욕하지 말라. 문학 장르인 ‘소설’은 이럴 때 쓰는 어휘가 아니다. 요절한 학자 김현(1942~1990) 선생은 「분석과 해석」에서 “이 세계는 과연 살만한 세상인가? 우리는 그런 질문을 던지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고 하였다. 맞다! 작은 이야기지만 ‘소설(小說)’은 그렇게 큰 세상 이야기인 ‘대설(大說)’을 꿈꾼다. 예를 들어보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의 단편소설 '민옹전'은 당시 조선의 대설을 꿈꾸며, 자칭 지도자들이라 일컫는 세력자들을 “종로를 메운 게 모조리 황충!”이라는 서슬 퍼런 문장으로 몰아붙였다. 그 부분은 이렇다.
“메뚜기들은 조그만 벌레이니 조금도 걱정할 것은 없지. 내가 보니 종로 거리를 메운 것은 모두 황충이야. 키는 모두가 칠 척 남짓이고 머리는 검고 눈은 반짝이는데 입은 커서 주먹이 들락거리지. 웃음을 지으면서 떼로 다니니 발꿈치가 닿고 엉덩이를 잇대고는 얼마 남지 않은 곡식을 모조리 축내니 이 무리들과 같은 건 없을 게야. 내가 이것들을 잡아버리고 싶은데 커다란 바가지가 없는 게 한스럽다네.”
나라에서 메뚜기가 창궐하여 백성들이 애써 키운 벼를 갉아먹으니 이를 잡아들이라 한다. 그러자 소설 속 주인공인 ‘민옹(閔翁)’은 메뚜기가 아닌, 황충(蝗蟲)을 잡으라 한다. 성종 7년(1476년)의 기록을 보면 중국 당태종(唐太宗, 재위 626~649)이 이 ‘황충’을 날로 먹었다는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중국에서 당태종은 안시성 싸움에서 양만춘에 의해 애꾸눈이 된 그가 아니다. 나라의 기틀을 놓은 훌륭한 군주이다. 그가 지었다는 「정관정요(貞觀政要)」라는 책은 정치학 교재처럼 읽혔다. 이 당태종이 메뚜기 떼가 들이닥치자 백관들을 모아놓고 “백성은 곡식을 생명으로 하는데, 네가 곡식을 먹으니 차라리 내 폐장을 파먹어라!” 외치며 황충을 날로 씹어 삼켰다고 한다. 이 무슨 뜻인가? ‘황충이 바로 탐관오리’라는 말이다. 그러니 황충 같은 짓을 하면 너희들의 폐장을 내가 씹어 먹겠다는 뜻이다. 이게 ‘소설’이다.
“2025년 의대 정원 2000명을 늘린다”는 정부의 포고문이 나왔다. 국가복지를 위해 의대 정원 늘리는 것은 당연히 찬성한다. 하지만 어떻게 갑자기 한 해에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리나? 교수진이며 그 교육시간과 교육공간은 어떻게 확보하는지 아무런 계획도 없이 말이다. 선거 즈음, 표를 얻기 위해 갑자기 발표한 졸속행정이다. 진정 국민을 위해서가 아닌 것쯤은 개·돼지가 아닌 다음에는 다 안다. 이에 즉각 의사들은 총파업을 결행했다. 하지만 누가 이길까? 당연히 정부가 이긴다. 사망자라도 한 사람 나오면 게임은 종결된다. 그 책임이 정부가 아닌 의사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지금도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어버린 언론들은 〈 “의사가 이긴다고? 보여주겠다.”…윤 대통령의 ‘인내’ 끝나간다〉 이런 류의 협박성 기사를 제목으로 뽑아낸다. ‘대통령이 사라지자 대통령 지지율이 올랐다’는 어처구니없는 통계 보도도 보인다.
소설에는 ‘나흘을 남겨두고 국가 간 약속을 파기’하는 일이이나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사라진 대통령 지지율 반등’ 따위가 없다. ‘소설’은 저런 괴상하고 기이하고 허황한 세상을 그리지 않는다. 이 세계는 과연 사람이 살만한 세상인가를 써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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