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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령군(眞靈君)을 통해 보는 김건희(金建希) 여사(女史)

  • 2024-02-07 03:3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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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령군(眞靈君)을 통해 보는 김건희(金建希) 여사(女史)

고종 31년 갑오(1894) 7월 5일(기묘) ‘간신 민영준과 진령군을 효수하여 백성의 원통함을 풀어 줄 것을 청하는 전 형조 참의 지석영의 상소’가 조정에 올라왔다. 송촌(松村) 지석영(池錫永,1855~1935)은 우리가 잘 아는 종두법(種痘法: 천연두 예방법)을 보급한 의사이며 국어학자이다. 그가 상소를 올린 것은 민영준과 진령군 때문이었다. 잠시 130년 전, 저 시절로 가본다. 저 시절 역사를 뒤돌아보는 까닭은 지금 배울 게 있어서다.

 

“삼가 아룁니다.…지금 백성의 병이 골수까지 깊이 들어서 제거할 힘이 없으니, 한번 해원설분탕(解寃雪忿湯,원통함과 분함을 푸는 약)의 강한 약을 조제하여 쓰지 않는다면 비록 관중(管仲)과 제갈량(諸葛亮) 같은 술책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화타(華佗)와 편작(扁鵲) 같은 명의의 치료 효과는 없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약이 매우 독하지 않고서는 그 병이 낫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선생은 백성들의 병이 깊으니 ‘강하고 독한 약’을 쓰라 한다.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우리의 형편으로 볼 때 진실로 위급 존망의 시기입니다. 이런 때에 믿을 것이라곤 오직 민심이니, 민심이 호응하면 어떤 일이든지 시도해 볼만 합니다. 민심을 돌리고자 한다면 우선 그들의 바람을 따라야 하니, 그 바람은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그들의 원통함을 풀어 주어야 하니, 그들의 원통함은 무엇이겠습니까. 잔학한 자에게 원통함이 사무치는 것이니, 잔학한 자 가운데 누가 최고이겠습니까.”

 

저 시절에도 민심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백성들이 원통한 이유는 두 사람의 전횡 때문이란다. 선생은 정권을 전횡하고 임금의 총명을 가리며, 백성들을 착취하고 오직 자신을 살찌우는 간신 민영준(閔泳駿)을 지목했다. 이 민영준이 후일 민영휘(閔泳徽,1852~1935)로 개명한 이다. 그는 민 왕후의 외척으로 일제강점기에 병조판서, 이조판서, 한일은행 은행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은 정치인이요, 친일반민족행위자다.

 

또 한 사람은 진령군이다. 선생은 ‘신령스러움을 빙자하여 임금을 현혹시키고 기도를 핑계로 국가의 재산을 축냈으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여 농간을 부리고 지방수령들과 왕래하며, 화와 복으로 백성을 무함(誣陷,없는 사실을 그럴듯하게 꾸며서 남을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함)하고 총애로 세상에 방자하다’며 요녀(妖女) 진령군(眞靈君)을 꼽았다. 선생은 거세인민지욕식기육자(擧世人民之欲食其肉者,온 세상 사람들이 그의 살점을 먹고 싶어 하는 자)라고 까지 극언을 하였다.

 

민 왕후와 진령군이 만난 것은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 때였다. 왕후 민씨(閔氏)는 충주로 피신하였고 이곳에서 자칭 관우(關羽)의 신녀(神女)라는 이씨 노파를 만난다. 이 노파가 궁으로 돌아가는 날을 맞추자 이때부터 민 왕후는 모든 것을 이 노파에게 의지했다. 늘 자신의 곁에 두고 북관왕묘(北關王廟,서울시 성북구 동소문동에 있었던 북묘)를 지어 거처하게 하고는 ‘진령군(眞靈君,참으로 신령한 분)’이라는 최상급의 호까지 내려주었다. 이러니 진령군이 민 왕후를 믿고 굿을 한다며 국고를 탕진해도 거스르는 자가 없고 사대부들 중, ‘어머니’니 ‘누님’이니 부르는 자들까지 생겼다. 진령군은 권력을 이용하여 벼슬자리를 파는 일까지 서슴없이 했고 북관묘는 매관매직의 소굴이 되었다. 나라 정사는 무너지고 국가 재정이 탕진되었으나 대신들도 권력에 눌려 누구하나 이를 꾸짖지 못했다.

 

고종 30년(1893)에 이를 보다 못한 강개한 선비 수파(守坡) 안효제(安孝濟, 1850~1912)가 〈청참북묘요녀소(請斬北廟妖女疏,북묘의 요녀 참수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때서야 조정과 재야의 인사들도 안효제의 상소에 호응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나라에 해독을 끼친 원흉이요, 백성에게 패악을 행하는 진령군의 죄를 묻지 않고 보호하였다. 오히려 진령군의 가자(假子, 양자로 들인 가짜 아들) 등의 사주로, 상소문을 받아 올린 승지 박시순은 유배되고 수파는 추자도로 귀양을 보냈다. 이때 수파가 상소 마지막에 쓴 “모두 두려워 감히 입을 열어 목을 베라고 청하지 못하니, 어찌 조정이 한심하다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을 새겨보아야 한다.

 

그 일 년 뒤, 지석영 선생이 올린 상소에 고종은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참작할 점이 있다.”할 뿐이었다. 선생의 상소는 갑오개혁(甲午改革,흥선대원군이 김홍집 등과 민 왕후를 축출하고 개혁을 꾀한 사건)과 맞춰져 있었지만 민영준은 살아남아 부귀영화를 누리고 천수까지 다했다. 요녀 진령군의 죽음도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조선이 쇠망의 길로 들어선 것은 분명하였다. 이로부터 얼마 뒤인 1910년 조선은 일본에게 국권을 강탈당하였고 백성들은 망국민으로서 처참한 삶을 살아야만 했다.

 

요즈음 영국 로이터통신·가디언·BBC·파이낸셜타임스, 일본 산케이·주간 후지, 아르헨티나 인포바에, 칠레 라테르세라 등 세계 언론은 한국의 ‘김건희 여사 가방 수수’ 상황을 전하기에 바쁘다. 세계 최대 영문 일간지인 타임스오브인디아는 ‘마리 앙투아네트에 비유된 한국의 영부인’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200달러 디올 핸드백이 한국 여당을 뒤흔들다’(A $2,200 Dior Handbag Shakes South Korea’s Ruling Party) 기사를 내고 “한국인 대다수는 이 의혹을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하는 보도를 내보냈다. 이렇게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되었지만 대통령은 ‘김건희 여사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대다수 언론은 보도를 금기시하며 정권의 눈치만 보고 있다. 130년 전, 진령군에서 김건희 여사를 새겨보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2024년 2월 대한민국, 민심은 흉흉하고 백성들의 삶은 고통스러운데도 ‘해원설분탕’을 조제하지 않는다. 국가가 국가의 책무를 방기할 때, 백성들의 일상은 피폐해지고 ‘복지국가(福祉國家,좋은 건강, 윤택한 생활, 안락한 환경들이 어우러져 누구나 행복을 누리는 나라)’도 멀어진다. 질문해 보자. 국민 대다수의 삶을 보자면 이 시절이, 조선 말 저 시절보다 낫다고 할 만한가? ‘0.7명, 저출산 전 세계 1위’, ‘OECD 국가 중 청소년·노인 자살률 1위’, 대한민국 복지의 현주소이다. 국가는 가급인족(家給人足,집집마다 삶이 풍요로움)의 복지사회를 위해 해원설분탕을 조제하고 국민들이 시원하게 그 탕을 한 사발씩 쭉 들이킬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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