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명(虛名)의 시대, 다리 아래서 원을 꾸짖는다?
견리망의(見利忘義),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다’라는 말이다. 이 맘 때면 등장하는 게 '교수신문'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다. 견리망의는 출세와 권력이라는 이익을 얻기 위해 정의를 버렸다는 의미이다. 정치인으로서 고위 공직자로서 공익을 추구해야 하거늘 사익에 눈이 먼 행동을 하는 이들을 지적하는 성어이다. 다음이 ‘잘못한 놈이 도리어 매를 든다’는 적반하장(賊反荷杖)이란다.
세 번째가 ‘피리를 불 줄도 모르면서 피리 부는 악사들 틈에 끼어 인원수를 채운다’는 남우충수(濫竽充數)였다. 남우충수는 남곽취우(南郭吹竽)라고도 한다. 제나라 선왕이 우(竽:피리)를 좋아하여 악사 3백 명을 두었는데, 그 중에 남곽(南郭)이 슬쩍 끼었다. 남곽은 피리를 전혀 불지 못했지만 악사들 틈에서 흉내만 내며 국록만 축냈다. 선왕이 죽고 아들이 즉위하여 한 사람씩 연주를 시켰다. 남곽은 허명(虛名)만 지닌 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탄로 날까 두려워 도망쳤다. 《한비자(韓非子)》 〈내저설(內儲說)〉에 보인다.
허명(虛名, 헛된 명성)! 그렇다. 가히 허명의 시대이다. 남곽과 같은 허명을 지닌 자들이 설치는 세상이다. 나부터 반성해 본다. 교수 집단이 선택한 저 고상한 사자성어가 정녕 저들의 잘못을 따끔하게 꾸짖는 것일까? 개개인으로서는 정권과 권력에 자발적인 복종의 맹세를 하거나 비굴하게 자기검열을 하느라 할 말을 못하고 쓸 글 못 쓰는 이들이 더 많지 않은가. 이러니 옳고 그름이 뒤섞여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없는 사이비(似而非)들의 세상이 되어버렸다. 물론 이 사이비 세상을 만드는데 나 역시 일조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들어 가슴이 서늘해진다.
이 시대 대한민국을 이끈다는 이들, 자칭 지식인이라는 이들 중에 저 허명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이름만 장관이고, 국회의원이고, 대통령이고, 교수이고, 지식인이고, 언론인이고, 성직자고, …깜냥도 안 되는 이들이 모두 허명만 믿고 설치는 세상이다. 돌멩이에 불과한 연석(燕石)을 옥구슬처럼 여기고 쥐를 말린 포인 서석(鼠腊)을 옥덩이라며 중히 떠받드는 꼴이다. 이러니 현 법무부장관을 여당 비대위원장으로 모시자며 ‘이순신과 12척의 배 운운’하는 따위 코미디급 보도들이 오늘도 너저분하게 떠돈다.
그래, 어느 고등학생의 말이 교수들이 뽑았다는 저 고상한 사자성어보다 2023년 대한민국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는 듯해 인용해 본다. 그 고등학생이 꼽았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업적 네 가지는 이렇다. 우선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서울대 법대 수준이 저 모양이란 걸 몸소 보여주어 서열화된 학벌 인식을 약화시켰다. 둘째로 공익의 대표자라는 검사들의 민낯을 보았다.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공공의 복리를 도모하기는커녕 얄팍한 법 지식을 활용해 사회적 약자와 정적을 괴롭히는 자들이다. 셋째로 공산주의를 제대로 공부하였다. 아이들에게 공산주의는 교과서에서나 주마간산 격으로 만날 수 있는 낯선 이념인데 애꿎게도 홍범도 장군이 엮이며 학습 의욕을 불러일으켰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민주주의가 일순간 무너질 수도 있는 허약한 제도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게 윤석열 대통령의 최대 업적이란다.
우리 속담에 “다리 아래서 원을 꾸짖는다”는 말이 있다. 직접 만나서 당당하게 말하지는 못하고 안 들리는 데 숨어서 뒷공론이나 한다는 뜻이다. 그 사람을 경멸하고 꾸짖고는 싶으나 대놓고 이야기하면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 듣지 않는 다리 밑에서 들떼놓고 빈정거리는 짓이다. 우리네[특히 지식인] 얄망궂은 한 품성을 적절히 담아낸 속담이다. 듣지 않는 데서 백날을 떠들어야 의미 없는 말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바른 소리에 관한한 혀짤배기 반송장이요, 먼장질만 해대는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 허명의 시대, 다리 아래서 원님만 꾸짖어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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