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표의 단식에 함께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
[간호윤의 실학으로 읽는, 지금] (41) 홍범도 장군을 육사에서 퇴출하지 말아야 할 이유 ①
지금까지 홍범도를 알고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긴 재러 작가 김세일(1912~?) 씨. 그가 북한에 들어갔을 때 홍범도가 홍경래(洪景來,1780~1812) 가문이라는 말을 들었단다. 1811년, 조선 왕조의 부정과 폐단에 맞서 대규모 민중 항쟁을 일으킨 홍경래, 남양 홍씨로 평안도 용강군 다미동에서 태어났으니 일리 있는 전언이다. 그때 백성들이 “철산 치오/가산 치오/정주 치오”하고 부른 노래가 <홍경래 타령>이다. 홍경래가 평안북도라면 홍범도는 평안남도에서 떨쳐 일어났다. 묘한 울림으로 '홍범도 장군을 육사에서 퇴출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쓴다.
차마 눈뜨고 못 볼 형국이다. 이 정부의 행태를. '타령(打令)'은 백성들이 응어리진 한을 풀려 부르는 민요인데, 권력 쥔 자들이 때 아닌 '공산당 타령'을 부른다. 이러니 백성들도 “대통령도 치오/장관들도 치오/국힘당도 치오” <탄핵 타령>이 나올 듯하다. 교육부가 교무부(敎無部)가 되어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1888~1968) 선생이 북한으로 갔다며 <임꺽정>을 가르치지 말라더니, 이번에는 국방부가 국망부(國亡部)가 돼 홍범도 장군이 공산당이라며 육사에서 흉상 퇴출이란 모욕을 가하며 '홍범도 함'까지 개명하려 든다.
①인품: 여천(汝千) 홍범도(洪範圖,1868~1943) 장군의 태생은 비천하였으나 우리 독립운동사에, 아니 역사에 장엄한 획을 그었다. 홍범도는 산포수 생활을 하다 1895년(27세)에 명성황후 시해를 계기로 의병을 일으켜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1842~1915)과 합류하였다. 이때 유인석은 50대 중반의 대학자로 역시 제자들과 을미의병을 일으켰고 1910년 6월 연해주에서 조직된 대한13도의군 도총재에 추대된 역사적 인물이다. 이 유인석과 홍범도는 연령도 26세나 차이 나고 신분도 완연 달랐다. 이 유인석의 문집 『의암집』에 홍범도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여홍여천범도(與洪汝千範圖)〉 등 세 편의 답신이 그것인데, 홍범도의 호를 '여천(汝千)'이라 하였다. 유인석의 자(字)가 '여성(汝聖)'인 점으로 미루어 자신의 자로서 홍범도에게 호를 지어 준 듯하다. 답신을 보면 유인석은 홍범도를 대단히 비범한 인물로 본다.
“족하께서는 대의를 믿고 큰일을 벌였소. 충모와 용맹을 발휘하여 무리가 당신을 믿고 복종하게 하였소. 전후로 여러 차례 싸워 왜적을 많이 죽여서 명성이 온 나라에 진동하는구려. 인석은 본국에 있으며 익히 듣고 마음으로 기뻐하였는데 이곳[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왔기에 듣지 못할 것을 더 듣게 되니 지극히 마음속에 감동하오. …근래 듣기로 휘하 군사를 이끌고 북쪽 청(淸) 지역으로 들어갔다는데 우러러 생각해보니 몹시 고되고 어려울 거라 생각하오. 또한 내어놓는 계책이 한편 비할 것 없이 놀랍고 한편 염려할 것 없이 믿을만하오이다.(足下仗大義擧大事 忠謀勇畧 致衆信服 前後累戰 多殺賊倭 聲名動一國 麟錫在本國 耳慣心悅 及到此地 益聞所不聞 極有感動于中者 …近聞揮率麾下 北入淸地 仰念備辛艱 亦揣出謀策 一以驚無比 一以恃不恐)”(1908.12.2.)라거나 “듣건대 의로움으로 사람을 감화시키고 도처에서 바람을 일으켜 사람들로 하여금 기운을 북돋는다하더이다. 뿐만 아니라 왜적의 강함이 삼국시대 조조와 같은데 우리는 제갈량도 오호대장도 없으나 우리 홍여천 만이 비록 오호대장의 한 명이오. (聞仗義感人 到處風生 令人增氣 但倭賊之强 不啻如三國之曹操 在我先無諸葛亮 且無五虎大將 我洪汝千雖曰爲五虎之一)"(1910.1.28)라 한다. '오호대장'은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촉한의 다섯 호랑이 대장으로 우리가 잘 아는 관우, 장비, 조운, 황충, 마초이다. 또 같은 해 2월 24일에는 '적을 알고 나를 아는 명장이 되려면 글을 읽어야 한다'고 따뜻한 격려도 건넨다. 홍범도와 의병 활동을 한 리승(리민환)은 “홍범도 장군의 기력은 보통 사람 2~3명의 용기를 가졌고 특이한 것은 그의 눈에 시퍼런 불이 번쩍하는 것이 마치 범의 눈과 같다.”(『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홍범도 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454쪽: 이하 '쪽' 인용은 같은 책이다.)고 전언한다. 소앙(素昻) 조용은(趙鏞殷, 1887~1958)은 한국 독립운동가 82인 열전인 『유방집』 <홍범도전>에서 “체구가 장대하고 기개가 높았으며, 글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타고난 성품은 의협심이 강해 어려운 사람 돕는 것을 급선무로 여겨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고 홍범도의 인품을 적바림하였다.
②가족: 홍범도의 구슬프고 격정적인 삶은 그가 구술한 『홍범도 일지』에 이렇게 시작한다. “고려 평양 서문안 문열사 앞에서 탄생하여 모친은 칠일 만에 죽고 아버지 품에서 여러분 젖을 얻어먹고 자라 9세에 아버지 세상을 떠나니 남의 집으로 다니며 머슴살이로 고생하면서…”(3쪽, 원문은 방언이 많아 필자가 현대어로 바꾸었다.)
홍범도는 15세에서 19세까지 평양감영에서 병정생활을 한다. 이때 보직이 나팔수였다. 20세에서 25세까지 종이 만드는 제지공으로 일한다. 하지만 품삯을 받지 못하고 모욕을 당하자 주인 삼형제를 살해하고 도피한다. 강원도 신계사로 들어간 홍범도는 지담 스님을 상좌로 모시고 글을 익힌다. 이 시절 비구니 단양 이씨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의병을 일으킨 해가 1895년 27세이다. 유인석과 합류하였으나 경험 부족으로 패하자 이후 농사짓고 산포수 생활을 하는 한편 단독으로 의병 활동을 하였다.
홍범도가 본격적으로 항일 의병 활동을 전개한 것은 1904년(36세)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6개월 만에 탈옥해서다. 그는 주로 함경도 삼수, 갑산, 함흥 등지에서 산포수들을 규합하여 일병과 교전을 벌이고 친일파를 처단하였다. 이 활동 과정에서 일경은 부인 단양 이씨와 큰아들 양순을 잡아 고문하며 자수를 권하는 편지를 쓰게 한다. 홍범도는 『홍범도 일지』에 이렇게 구술하였다. “'계집이나 사나이나 영웅호걸이라도 실끝 같은 목숨이 없어지면 그뿐이거든, 계집 글자로 영웅호걸이 곧이듣지 않는다. 너이 놈들이 나하고 말하지 말고 너희 마음대로 할 것이지. 나 아니 쓴다.'고 무수한 욕질한 즉, 저 악독한 놈들이 발가락 두 사이에다 심지에 불 달아 끼우고 반죽음 시켜도 종내 항복치 않으므로…”(6쪽) 이로 인하여 부인은 죽고, 같은 해 장남 양순도 아버지와 '정평 바맥이 전투'에서 중대장으로 일본군 500명과 싸우다 전사한다. 이 해가 1908년으로 양순의 나이 겨우 16세이다. 둘째 아들 용환도 이 해 12세로 아버지를 따라 의병의 길을 걸어 독립군 제4군 대장이 되었고 러시아에서 병마로 쓸쓸히 눈을 감았다.
▶다음 회에서 계속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 인하대학교 초빙교수/고전독작가(古典讀作家)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용혜인과 박지현
노예들의 천국과 주인들의 지옥
댓글
저놈들은 이걸 시발점으로
나라를 완전 혼돈에 빠뜨릴것임
극우의 전형적인 행태 ㅡ 연성독재 ㅡ 파시즘
저러한 이들은 처음 봅니다. 힘을 합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