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발언
정청래 당대표, 역사와정의특별위원회-국가보훈정책특별위원회 보훈·역사 분야 정책 간담회 인사말
정청래 당대표, 역사와정의특별위원회-국가보훈정책특별위원회 보훈·역사 분야 정책 간담회 인사말
□ 일시 : 2025년 12월 4일(목) 오후 3시
□ 장소 : 국회 본청 원내대표회의실
■ 정청래 당대표
전당대회 때, 저에게 민주당이 보훈 정책에도 앞장서고 잘할 수 있는데, 대선 때 그런 활동을 하신 분들이 있는데, 당에 특별위원회로 만들었으면 좋겠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제가 거의 그냥 동시에 그렇게 하겠다라고 수첩에다가 메모를 하고 보훈정책특별위원회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이 자리에 참석하신 우리 기라성 같은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님, 김창록 교수님, 여러분들 이렇게 모시고 행사를 하다 보니까, 앞으로 더 잘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 민홍철 국가보훈정책특별위원장님, 김용만 역사와정의특별위원장님 비롯한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원래 당대표가 되면, 교육연수원장까지 겸하겠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었는데,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더라구요. 대신 제가 강사로는 다니겠다 하면서, 전국 17개 시도당 당원 교육을 지금 하고 있는데, 많이들 오세요. 천 명씩 오시고 그렇게 하는데, 제가 가서 저희 어머님 일대기를 이야기합니다. 역사가 교과서에서만 나오고, 나와는 관계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라는 것을 제가 강조하기 위해서 저희 어머니 이야기를 하거든요. 짤막하게 소개해드리면 이렇습니다.
1921년도에 태어나서, 18살 때 아버지 만나서, 15살짜리 꼬마 신랑에서 시집와서, 10명을 낳았고, 10명 중에 다섯 잃고, 다섯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호적으로는 5남매 중에 막내인데, 실제로는 10명 중에 막내입니다. 어머니가 21년에 태어나서 94년도에 돌아가실 때까지 경험했던 한국 현대사, 아버지를 일제 강제 징용에 끌려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울었고, 또 일본 홋카이도 탄광에서 3년 동안 석탄 캐다가 돈 한 푼 없이 돌아오셨을 때, 또 남루한 옷차림, 옷 한 벌이었다고 합니다.
또 6.25 때는 저희 동네가 인민군 빨치산이 많아서, 낮에서는 국군, 밤에는 인민군이 지배하는 위험천만한 동네였고, 어머니가 정무적 감각이 있어서 균형외교를 했습니다. 국군들도 도와주고, 인민군도 도와주고, 살려니까 그랬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인민군들이 와서 아버지를 끌어내서 국군 편이라고 해서, 집 앞에 있는 논바닥에서 인민재판에 끌려갔고, 실제로 총살형 선고를 받고, 사형장에 끌려갔다가 간신히 살아나와서, 지서에 가서 자수해서 살게 되었고, 그리고 이제 큰 형님이 생존해 계십니다만, 87세입니다. 중학교 때 돈이 없어서 중3 때, 공부 잘했다고 그러는데, 자퇴시키고, 산에 나무하러 가는 뒷모습을 보아야 했던 저희 어머니.
저는 또 안 낳으려다 낳거든요. 조카보다 5개월 늦게 어머니가 저를 가져서, 두 번이나 떼려고 그랬고, 안 낳으려다 낳은 아들, 어렵게 저희 동네에서는 대학생이 제가 처음입니다. 그랬는데, 학생운동 한다고 수배받고, 안기부 요원들하고 경찰들이 집으로 잡으러 출동하고, 이런 걸 한국 현대사 100년 동안 경험을 하셨는데, 오늘 우리가 사는 역사는 이처럼 100년 전에 그 수 많은 분들의 노고였고, 그리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어느 산골짜기에 쓰러져간 독립영웅들도 실제로 많고, 애국지사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독립운동가, 애국지사들은 유명한 분들인 거죠. 그렇지만 그에 못지않은, 작지만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수많은 우리 영웅들이 실제로 많이 존재하는데, 우리가 잊혀지고 묻혀진 역사 때문에 그분들을 다 기억을 못 하고 있을 뿐이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오늘은, 우리 선배 독립운동, 애국지사 열사들이 그토록 열망했던 미래라는 사실을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또 우리가 제대로 잘 살아야 이 땅, 한반도에 살아갈 우리의 후손들이, 또 우리를 선배로 생각하면서 그 길을 잘 이어받지 않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옥석을 구분하고, 이런 선열들의 업적과 공적을 발굴하고 찾아내서 기리고 선양하는 것은 국가의 정체성과 국가의 기본에도 맞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제가 폴란드 아우슈비츠에 두 번 갔다 온 경험이 있습니다. 아우슈비츠의 처참한 광경을 보면서, 그것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보존을 하는 이유는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산 교육의 장으로 삼기 위해서 그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거기에 널브러진 가방, 구두, 그리고 인형, 그리고 화학실험을 했던 그 장소 이런 데를 다녀보면서,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겠습니까? 그런 것처럼, 우리가 보존을 하고 지켜야 할 것은 지키고, 또 묻혀있는 의미 있는 분들에 대한 발굴 이런 것들도 잘해야 될 것 같습니다.
한 가지 개인적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우리 민족문제연구소 제가 유료회원입니다. 방학진 실장님 제가 언제 가입했다고 그랬죠? 지난번에, 제가 99년 10월 달에 민족문제연구소 유료회원으로서 한 번도 끊이지 않고 매달 후원을 하고 있는데, 제가 자랑스럽게 생각을 합니다. 제가 민족문제연구소 99년도에 유료후원회원이 된 것도, 저에게는 특별한 젊은 날의 일이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운다는 차원에서 건대에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계기로 민족문제연구소를 방문해서, 우리 방학진 실장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깨우쳐서 방학진 실장처럼은 못하더라도, 뒤에서 후원이라도 해야 하겠다. 그것이 의미 있는 일이지 않겠는가 해서 그래서 지금도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이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미국이 지금 미국처럼 될 수 있던 것도,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처럼, 미국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은 조국이 잊지 않고 끝까지 찾아가서 구하고, 선양한다는 그런 미국의 역사는 짧지만, 그런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미국이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미국은 보훈처 공무원도 그렇게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보훈처를 좀 더 강화하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고생하신 분들의 노고를 잊지 않고, 그분들을 기억하는 것이 앞으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도 매우 좋은 일이다, 라고 생각하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 더불어민주당이 국가보훈정책특별위원회를 만들어서 이 위원회를 중심으로 그런 보훈 정책을 좀 더 보강하고 또 정부 보훈처에서 할 수 없는 그런 일들에 대해서도 우리가 그런 일을 앞장서서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제가 당대표가 되고 나서는 의원들이 저 보고는 법을 내지 말래요.
제가 법을 내면 당론 비슷하게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법을 못 내고 있습니다. 당대표가 돼서 나서는. 그런데 며칠 전에 1호로 법을 냈습니다. 그 법이 독립기념관법 개정안입니다. 그래서 왜 독립기념관은 왜 천안에만 있어야 되느냐. 우리 대구에도 독립기념관을 세우고 싶다. 그래서 분원을 세울 수 있는 그게 가능하게 하는, 독립기념관법 개정안을 그래서 며칠 전에 발의했습니다. 이건 내도 되냐고 했더니, 이건 내도 된다고, 오히려 당론처럼 되니까 더 좋다고 그래서 독립기념관법 개정안을 당대표 1호 법안으로 냈습니다. 좀 말이 길었는데요. 오늘 오신 여러분들 환영하고, 대한민국의 국가보훈정책에 대해서 점진적이고 발전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으면 좋겠습니다.
2025년 12월 4일
더불어민주당 공보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