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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의 ‘참(站)’73
73. 거짓이 판치는 시대에 진실을 말하는 법!
“거짓이 판치는 시대에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곧 혁명이다.”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 말이다. 그러나 말이 쉽지,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인지를 모른다. 더욱이 ‘혁명(革命)’은 멀고 먼 용어일 뿐이다.
『탈무드』의 <굴뚝 청소한 두 아이>를 보자.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했는데, 한 아이는 얼굴이 더럽고, 다른 아이는 깨끗하다. “누가 세수를 할까?” “아이가 세수를 한다”가 맞다. 이유는? 더러운 아이는 상대방 얼굴이 깨끗하여 자기 얼굴도 깨끗한가 보다하고 씻지 않지만, 깨끗한 아이는 상대방의 얼굴이 더러우니 내 얼굴도 더럽다고 생각해 씻는다.
그런데 이게 정답일까? 굴뚝 청소를 함께 했다. 어떻게 한 아이 얼굴은 깨끗하고 한 아이 얼굴은 더러울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거짓과 진실은 무엇일까? “누가 세수를 할까?”라 물은 자가 거짓이다. 유대인 교육의 중요한 부분인 하부르타(토론식 학습)의 예시로 자주 사용되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로 유대인들은 아이들의 논리와 비판적 사고를 키운단다.
이제 이솝 우언 중, 유명한 <거북이와 토끼>를 보자. 토끼와 거북이가 달리기 경주를 했다. 달리다가 토끼는 나무 그늘에서 잠을 잤다. 거북이는 꾸준히 달려 승리했다. 이 우언의 교훈은 “천천히 노력하는 자가 승리한다”라 배웠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수중 경기라면 몰라도 토끼가 질 확률이 0.1%나 될까? 거북이의 ‘노력’과 토끼에게 없는 ‘겸손’이 인간의 삶에 모두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보편적 결과로 타당치 않다. 즉 <거북이와 토끼> 이야기의 거짓은 ‘노력의 가치’를 지나치게 과장한 점이요, 진실은 ‘거북이와 토끼는 달리기 경주를 시키면 안 된다’이다.
『지금은 없는 이야기』에 수록된 <가위바위보>란 이야기도 있다. 모든 일을 오른손 가위바위보로 결정짓는 마을이 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마을 일을 하다가 오른손을 다쳐 펼 수 없게 된다. 사람들은 그가 주먹밖에 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보를 내어 마음대로 부려 먹는다. 그는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마을 대표를 찾아갔다. 가위바위보를 왼손으로 하게 해달라고. 마을 대표는 우리의 규칙은 신성한 것이며 신성한 일은 반드시 오른손으로 해야 한다며 이렇게 말한다. “규칙이란 언제 어디서나 지켜져야 하는 거야. 그래야 그게 규칙이지. 반드시 가위바위보는 오른손으로만 해야 해.”
그가 “마을 일을 하다 다친 건데 너무 억울합니다”하고 다시 호소했다. 마을 대표는 마침내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며 따르겠냐고 묻는다. 그는 당연히 “따르겠습니다”하였다. 마을 대표의 말은 이렇다. “자, 내 말 잘 들어보게. 자네 말대로 하겠네. ‘왼손으로 가위바위보를 해도 좋다’는 규칙을 걸고 가위바위보를 하는 걸게. 자네가 우리 모두를 이기면 자네 뜻대로 규칙을 바꾸는 거지. 어떠한가? 자네 뜻대로 됐지. 규칙은 지켜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 말도 안 되는 억지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듯 억지 논리로 문제만 풀고 답만 외우는 공부를 하였다. 마치 플라톤의 『국가』 제7권에 보이는 ‘동굴의 우상’처럼, 배운 것만이 진리라 생각한다. 지하 동굴의 지도자들은 서로 묶여 동굴 안 벽만 바라보아야 ‘진정한 사람’이라 가르쳤다. 빛은 동굴 입구에서 점점 동굴 안으로 비춘다. 물론 뒤를 돌아보는 것은 ‘금기’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빛을 보지 못하고 벽에 비친 자신들의 그림자만 보고 진실이라 믿는다. 손과 발이 서로 묶여 앞만 보는 그림자가 거짓인데도 우상처럼 믿는다. ‘벽에 비췬 그림자는 내가 아니다’가 진실이다.
위의 ‘세 이야기’의 진실을 찾으려면 동굴 밖 세상으로 나가려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거짓이 판치는 시대는 진실을 찾으려는 용기가 없을 때 만들어진다. 진실을 말하는 법! 그것은 진실을 찾으려는 ‘용기’와 ‘행동’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러할 때 ‘혁명’이 비둘기 날갯짓처럼 조용히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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