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의 일주기 제사를 모시고 - 정동영 당의장
어머님이 돌아가신지 어언 한 해가 흘렀다. 돌아가신 날은 작년 5월 4일, 음력 3월 26일이었는데 올 해에는 음력으로 4월 23일 일요일이었다. 이날만큼은 다른 일정을 잡지 않고 제사 지낼 준비를 했다. 제사 음식을 마련하느라 부산한 아내와 제수 분들이 오가는 거실에 앉아 오랜만에 어머님 생각에 젖어드니 만감이 교차하며 새삼 어머님이 그리워 가슴이 답답해졌다.
어머님과 나는 모자지간이면서도 연인처럼 다정하고 각별했다. 내 앞으로 네 명의 어린 아들을 질병으로 잃은 어머니께서는 다섯째면서도 장남이 된 내게 무한한 애정과 기대를 가지셨다. 제대로 된 병의원이 있는 전주까지 나오자면 지금도 많은 시간이 걸리는 산골오지에 사셨던 탓에 어머니께서는 황당하게도 줄줄이 혈육을 품에서 떠내 보내야했다. 일제 말기에서 6.25전쟁 기간이 겹쳐지는 기간이라 어느 집에서나 그러했겠지만 제대로 성장해보지도 못한 어린 아들을 연이어 잃어버린 어머니의 심정이 오죽했을까 짐작이 쉽지 않다.
어머님께서는 슬하에 아홉 형제를 두셨는데 그 중 다섯을 유아기에 잃어버리고 나를 비롯해 네 형제를 성장시키셨다. 지금도 가족 앨범 속에 있는 사진에는 일찍 세상을 뜬 내 바로 아래 동생의 모습이 있다. 그 아래로 태어난 3형제를 더 하여 우리는 4형제가 되었다. 그런 신산스런 정황 속에서 13대 종손이자 장남 노릇을 하게 된 나는 그야말로 어머니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아들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부터 대처로 유학을 나갔던 나는 방학이 되어 돌아올 때마다 동생들이 받아보지 못하는 후한 대접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어머님께서 직접 지어주시는 밥과 반찬을 비롯한 음식은 아직도 내 입맛을 장악하고 있다. 내가 좋아했기에 그러셨겠지만, 어머니께서는 내가 시골집으로 돌아오는 날이면 유난히도 찰밥 한 그릇을 내 몫으로 밥상 위에 올려놓곤 하셨다. 그러니 찰밥에 대한 나의 입맛은 내가 선택했다기보다 어머니의 애정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내가 맛있다는 말을 하면 너무나 환한 얼굴로 소녀처럼 좋아하시기에, 나는 어머님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서라도 찰밥 맛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찰밥과 함께 나오는 반찬에는 두부졸임이 있었다. 적당히 토막 낸 두부 위에 계란을 터트려 올리고, 다시 그 위에 고춧가루를 듬뿍 치고, 멸치와 매운 고추를 얹어 국물이 다 졸을 때까지 복작복작 끓여내는 별미의 반찬이다. 이 두부졸임은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다.
어머니는 참으로 빼어난 음식솜씨를 지니고 계셨다. 설사 뜰 앞에서 뜯어온 대수롭지 않은 푸성귀라도 어머님 손길이 슬쩍 스치기만 하면 감칠맛 나는 음식으로 변했다. 겨울 아침 흰 김을 뭉게뭉게 피워내며 밥상에 놓여 있던 시레기국, 신선들이나 먹을 것만 같던 동치미의 시원하고 아린 맛, 그리고 우리가 사투리로 ‘대수리국’이라 부르던 다슬기국 등은 아직도 내 식성의 고향이다.
중학교 2학년 봄철, 농번기를 맞아 나는 친구들을 몰고 시골집으로 갔다. 사전에 내가 온다는 기별을 받은 어머니께서는 아들과 아들 친구들에게 줄 작정으로 꽃지짐을 구워 내놓으셨다. 찹쌀로 지진 그 꽃지짐 위에 박은 진달래꽃을 따기 위해 어머니께서 손수 높은 산벼랑을 헤매셨다는 말을 듣고서는 입에 넣은 꽃지짐을 다 삼키지 못한 채 울먹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마 어머니께서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먹일 꽃지짐을 만들기 위해서는 동리 뒷산에 무더기로 피어 있는 진달래꽃보다 높은 산벼랑 끝에 피어 뭇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고, 세속의 먼지가 묻지 않은 꽃송이가 마땅하다 여기셨던 모양이다. 그런 정성에 감탄했던지 내 친구 녀석들은 우리 시골집에 내려가기만 하면 한 철 농사를 다 지을 만큼 열심히 일을 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친구가 많은 편이다. 순창 시골집에서도 그랬지만 이후 서울로 올라와 사근동에 살적에도 무슨 배짱이었던지 그 궁상스런 집으로 친구들을 몰고 갔다. 그러면 어머니께서는 양은 솥 하나 가득 찐빵을 쪄 주셨는데, 가까운 친구들은 아직도 그 찐빵 맛을 이야기 한다. 속에 단팥을 넣은 그 찐빵은 당시 시중에서 사먹던 삼립 단팥빵보다 훨씬 달콤했다.
그런 어머니에 대한 나의 정성은 보잘 것 없었다. 단지 순종하는 방법 밖에 몰랐다. 하지만 대학시절 맨 처음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 받은 첫 번 째 월급으로 당시로서는 고급이었던 오리엔트 시계를 사드린 기억이 있다. 그 시계를 손목에 차시고 그렇게도 기뻐하시던 모습에 얼마나 흡족했는지 모른다.
저녁 7시가 되자 어머니 제사를 모시기 위해 숙부님과 고모님께서 차례차례 도착하셨고 종형제와 외종들도 아이들을 데리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8시가 되어 동생들과 함께 제사상을 차렸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이태 전부터 성당에 다니셨고, 우리 부부가 가톨릭 신자인 탓에 제사는 유교식과 천주교식이 혼합된 형태를 취했다. 지방대신 영정을 모시고, 축문대신 기도문으로 예를 표했다.
기도를 하고 재배를 올리자니 뒤쪽에 있던 꼬맹이 조카들의 수선스러움이 정겹게 들려왔다. 어머니께서도 이 모양을 보시면서 기뻐하시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들 넷에 며느리 넷, 그리고 손자 다섯, 손녀 셋이 거의 다 모였고, 종형제와 외종형제 식구들까지 함께한 아파트 거실은 발 디딜 틈 없을 정도였다. 그들이 모두 어머니를 그리며 절을 올리니 저승에서나마 흡족하시리라는 안도감에 목이 메었다.
어머니는 평생 조상 제사 지내느라 일 년을 다 보내신 분이셨다. 지금은 합동으로 지내기에 일 년에 네 번 정도 기제사를 지내지만 어머니께서는 일찍 혼자되신 뒤에도 한 해에 열댓 번이 넘는 봉제사를 혼자 힘으로 치르셨다. 그리고 그 기제사에는 13대 종손인 내가 항상 제주 노릇을 담당했다.
집에서 제사를 모신 다음날 새벽, 어머니께서 다니시던 양재동 성당으로 가 연미사를 올렸다. 새벽 일찍 아파트 입구를 나서자니 아직은 쌀쌀한 기온이었으나 봄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미명 속에 선 화단의 꽃나무를 바라보면서 어머니께서는 그나마 좋은 시절에 떠나셨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고 돌아가신 지도 일 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실감이 적다.
어디 바람 좋은 정자로 놀러나가셔서 즐겁게 지내시고 있겠지, 평소 열심히 다니시던 노인대학에서 붓글씨의 삼매경에 빠져 묵향에 젖어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못내 어머니를 떠내 보낸 불효자의 슬픔을 잊으려 애쓰고 있다.